1990년대 초까지 일본은 미국과 맞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반도체 강국이었습니다.
특히, 버블 경제로 일본의 몸집이 부풀어져 있을 때는 세계의 기업 순위 중 일본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또한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적수가 없었고, 반도체 기업인 도시바는 세계 최초로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상용화하기도 했죠!
1988년 당시, 일본의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50.3%로 미국(36.8%)을 누르고 정점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약 30년이 지난 일본은 현재 반도체 산업에서 과거의 찬란한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시스템 반도체와 메모리, 여타 장비 등 반도체 시장 전반에서 일본의 점유율은 10.0%에 못 미친다고 합니다.
미국은 50.7%, 한국은 19%, 유럽은 10%, 대만은 6%, 중국은 5% 순입니다.
1992년만 하더라도 세계 10대 반도체 제조사 중 일본 기업은 6곳이나 됐습니다.
여기에는 NEC(일본전기), 도시바, 히타치제작소, 후지쓰, 미쓰비시전기, 마쓰시타전기(현 파나소닉)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9년에는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중 일본 회사는 키옥시아와 옛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만 있을 뿐이죠.
키옥시아도 사실 팹 오염 문제로 생산에 차질을 빚고 실질적으로 SK하이닉스에게 점유율도 밀리면서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앞서 1983년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개적으로 선포할 당시, 일본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당시 일본은 반도체 시장을 꽉 잡고 있었고,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아 경제 성장을 막 끌어올리고 있었기에 삼성은 적수가 되지 못했었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전자는 절대 반도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미쓰비시 연구소 같은 경우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의 문제 다음으로 취약한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회사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업이 좌초할 것이라는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 반도체 시장의 판도가 바뀌었고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위기를 맞습니다.
당시 D램 반도체는 대부분 대형컴퓨터에 사용되어서 수요가 기업을 중심으로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에게 PC가 보급되면서 D램의 크기가 줄어들었고 가격이 점차 저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일본은 갈라파고스화로 계속 큰 D램만 생산하면서 시장에서 뒤처지기 시작합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반도체를 만드는 건 70~80년대까지는 먹혀드는 전술이었지만, 나날이 발전하는 반도체 성장의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일본의 반도체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두고 일본은 '일본의 조락(凋落)'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반도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일본은 최근 반도체 사업을 다시 육성시키기로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임 미국 행정부가 시작한 미국의 대중 무역분쟁은 첨단 산업 쟁탈전으로 비화했고 첨단 디지털 산업의 꽃인 반도체는 가장 중요한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당시 스가 요시히데 일본 내각도 반도체의 중요성을 깨닫고 첨단 반도체 양산체제를 구축하고, 설계·개발 능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일본이 반도체 생산에서 힘을 많이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반도체 소재·장비 분야에서 세계적 강국입니다.
실제로 일본 신에쓰화학과 섬코(SUMCO)는 반도체 원판인 실리콘 웨이퍼 시장을 장악했고, 일본 도쿄오카공업(TOK)은 포토레지스트 감광재 분야 강자이며 스텔라케미카, 모리타화학, 쇼와덴코는 식각용 가스 분야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즉, 제조 기반 산업만큼은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것이죠.
그러나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반도체 산업이 IT계의 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 빠르게 개발과 생산에 박차를 가하면서 반도체 생산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제조 산업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은 언제 자리를 뺏길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반도체 산업을 빨리 육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일본은 반도체 산업이 지금처럼 벼랑 끝에 몰리기 전, 살려낼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D램 반도체 기업이었던 '엘피다'였습니다.
하지만 2012년 2월 27일 세계 3위 D램 반도체 업체였던 엘피다는 도쿄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미국 마이크론테크롤로지에 합병되면서 일본의 D램 전문업체는 한 곳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알려면 엘피다의 시작부터 알아야 합니다.
엘피다는 1999년 일본 NEC와 히타치제작소의 D램 사업부 통합으로 탄생했습니다.
2003년에는 미쓰비시전기의 반도체 사업부까지 합쳐 덩치를 키웠고 세계 시장 점유율이 20%로 반도체 기업 순위가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죠.
하지만 2000년대 삼성전자,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와의 치킨게임에서 패하며 점유율이 5%를 밑돌기 시작했어요.
일본이 무시했던 삼성전자한테 무참히 발린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엘피다가 2007~2008년 2년 연속 2000억 엔(약 1조 9389억 원) 넘는 적자를 냈고, 일본 정부와 채권단은 2009년 1100억 엔의 협조융자를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기인 2011년 말이 다가오자 일본 정부와 채권단은 융자의 연장을 거부했어요.
2011년 말 엘피다의 부채가 자기자본의 1.3배인 2900억 엔까지 불어나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2010년 말부터 D램 가격이 급락하고 엔화 가치는 급등하면서 엘피다는 5분기 연속 적자를 냈습니다.
그런데 엘피다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2012년은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린 해였습니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D램 수요가 폭발하면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법정관리를 신청한 일본의 마지막 D램 기업이었던 엘피다는 빛을 보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만약, 일본 정부가 1년만 더 융자를 연장해 주었더라면 일본의 반도체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자국 산업의 보조금을 끊어 마지막 남은 D램 업체를 고사시킨 것입니다.
반면, 엘피다의 경쟁사인 하이닉스는 오랜 D램 치킨게임 속에서도 한국 정부와 채권단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되살아나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2004년 엘피다와 비슷한 규모였던 SK하이닉스는 엘피다와 정반대의 길을 걸으면서 시가총액이 17배 늘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금까지도 디지털 혁명의 영향으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고 있지만, 일본의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1988년 50.3%에서 2019년 10.0%까지 내려앉았습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작년 6월 발표한 '반도체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 일본의 반도체 점유율은 ‘제로(0)’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일본은 반도체를 경제안보 차원에서 중요한 전략 물자로 지정하고,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의 생산공장을 규슈 구마모토에 유치하기로 하였습니다.
1조 엔으로 예상되는 건설비의 절반가량인 4000억 엔 이상을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D램으로 세계 2위까지 올라갔던 엘피다를 지원했으면 더 싼 비용으로 반도체 부흥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은 1100억 엔(1조 1000억 원)의 융자를 연장해 주지 않고 엘피다를 죽이고 그 이후에 반도체 생산을 위해 4000억 엔(4조 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구마모토 공장에서 막대한 투자를 통해 생산되는 반도체는 10~20나노라는 것입니다.
10~20나노는 자동차와 산업용 기계, 가전 등에 쓰이는데, 삼성전자와 TSMC가 3나노로 경쟁하는 것을 보면 10나노는 하청업체와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반도체 시장에서 대패했던 일본이 반도체의 부흥을 다시 이끌어내기 위해 강력한 연합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 기업이며 자동차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도요타를 필두로 키옥시아·소니·NTT·소프트뱅크·NEC·덴소·미쓰비시UFJ은행 등 일본 주요 기업이 출자하여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회사 이름은 ‘라피더스’로 라틴어로 '빠르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일본은 자국 내 안정적인 반도체 조달처를 확보하고 잃어버린 반도체 위상을 되찾기 위해 진심을 다해 투자와 인력을 늘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도요타의 경우, 미래에 자율주행과 첨단 반도체 수요가 커질 전망이라서 반도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소니와 소프트뱅크 같은 기업들도 IT와 관련되어 있기에 반도체 사업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해당 기업들은 새 회사를 통해 슈퍼컴퓨터와 자율주행, 인공지능(AI), 스마트시티 등 대량의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처리하는 분야에서 필수적인 첨단 반도체 기술을 개발해 5년 뒤인 2027년부터 양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해외에서 근무하는 일본 기술자를 불러들여 회로선폭 2나노미터(㎚, 10억분의 1m) 이하 반도체 자체 생산을 추진할 계획이에요.
이를 위해 해당 기업들은 우선 2나노 이하 공정 기술을 확립하고 2020년대 후반에 제조 라인을 구축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죠.
하지만 반도체 산업이 주목받고 있는 현재 대만과 한국이 가만히 지켜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한국과 대만에서 반도체 산업은 그냥 No.1 산업입니다.
그래도 미친듯이 투자의 열을 올리고 기술력 싸움을 펼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반도체의 기강을 잡겠다고 투자에 열을 올리면 한국과 대만은 역시 참지 않고 주머니를 다 털어서라도 반도체에 사활을 걸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은 영영 발끝도 쫓아오지 못하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구경만 하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에 일본 자국 내에서도 혈세를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요.
물론, 일본은 돈이 많기에 저 정도 투자로 끄떡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중국은 500억달러(약 65조6000억원)가 넘는 투자액과 거대한 인프라를 활용하여 반도체 시장을 확대하려고 했지만 고배를 마셨습니다.
미국의 오래된 반도체 기업인 인텔 역시 7나노에서 지친 것인지 '나노경쟁'이 의미가 없다고 혼자 이름을 바꾸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지만 어지간한 투자로 반도체 기술력을 따라잡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일본이 막대한 돈을 투자한다고 하더라도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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